고즈넉함과 소박함의 미학, 양성향교
양성향교 전경. 조미림 기자
신성한 홍살문이 가장 먼저 방문객을 맞는다. 단풍나무 사이를 몇 걸음 걷다 보면 모습을 드러내는 작고 소박한 건축물이 바로 ‘양성향교’다. 양성향교는 안성시 양성면에 위치한 조선 시대 교육기관으로, 1983년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8호로 지정됐으며 현재는 (재)경기도향교재단이 관리하고 있다.
‘향교’는 조선시대 지방에 세운 공립 교육기관으로서 공자와 성현에게 제사를 지내고 지역 학생을 교육하던 곳이다.
양성향교는 1533년 창건됐고 1774년 중건을 거쳐 여러 차례의 보수를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일각에서는 숙종 때 건립됐다는 주장도 있으나, 발견된 문헌들이 1533년 창건 설을 뒷받침한다.
앞쪽에 교육 공간인 명륜당을 두고 뒤쪽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을 배치한 전형적인 조선 향교 형식이며, 내삼문·외삼문을 갖추고 있다.
대성전은 정면 3칸·측면 3칸의 맞배지붕 구조로, 단정한 비례가 특징이다. 명륜당은 정면 5칸·측면 2칸 규모로 중앙 3칸은 마루, 좌우는 온돌방으로 꾸며졌다.
조선 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현재 교육 기능은 사라지고 제향만 이어지고 있으며, 조선 후기의 소규모 향교 형식을 잘 보여주는 유적이다. ‘고즈넉함’이라는 표현이 가장 어울리는 곳이다.
충절의 상징, 덕봉서원
덕봉서원 전경. 조미림 기자
안성시 양성면 덕봉리에 자리한 덕봉서원은 1972년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곳으로, 조선의 문신 양곡 오두인 선생(陽谷 吳斗寅 1624~1689)을 기리는 서원이다.
오두인(1649년 문과 장원)은 경기도관찰사, 공조판서, 한성판윤, 형조판서 등을 역임했으며, 그의 셋째아들 오태주는 숙종의 여동생 명안공주의 부마였다.
그러나 인현왕후가 부당하게 폐위되자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국문을 받고 유배되던 중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1689년). 숙종은 1694년 장희빈 사건의 진상을 알고 그를 영의정에 추증하고, ‘충정(忠貞)’이라는 시호와 불천지위를 내렸다.
이후 오두인은 ‘조선의 대표적 순절 충신’으로 기억되며, 고향 양성의 덕봉서원에 배향됐다. 사당 정면에는 ‘덕봉사우’ 현판이 걸려 있으며, 서원 앞에는 덕봉서원묘정비명이 있다. 건물은 사당(祠堂), 강당인 정의당(正義堂), 동재(東齋), 서재(西齋), 내삼문(內三門), 외삼문(外三門)이 있다. 동재와 서재는 1940년 훼손됐다가 새로 복원된 것이며 정의당은 1794년(정조)에 중수 후 지방교육에도 기여했다.
특히 덕봉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도 살아남은 전국 47개 존속 서원 중 하나로 그 의미를 더하고 있다.
안성문화원에서 오두인 선생 탄신 기념행사와 선비문화축제를 이곳에서 진행하기도 했다.
길 따라 걷다 보면 안성이 한눈에, 죽주산성
죽주산성 내 전경. 조미림 기자‘죽주산성’은 1km 남짓 이어지는 산성길을 따라 걸으며 안성 시내를 조망할 수 있어 시민과 관광객 모두에게 인기 있는 탐방 코스다. 산성은 비봉산(해발 391m) 동쪽 해발 250m 지점에 자리하고 있어 서쪽은 비봉산 산림을, 동쪽과 남쪽에서는 탁 트인 풍경을 관람할 수 있다.
죽주산성은 내성·중성·외성으로 구성돼 있으며, 삼국시대 초축 이후 고려·조선을 거치며 지속적으로 보수됐다.
초축 성벽은 정상부에서 능선을 따라 곡간부를 두르는 형태로, 둘레는 1,322m에 달한다. 성돌은 장방형으로 다듬어 ‘바른층쌓기’ 방식으로 축조됐고, 외벽에는 보축성벽이 덧붙여졌다. 축성 기법은 6세기 후반~7세기 초 신라의 양식을 보여준다.
고려 고종 23년(1236년) 몽고군의 침입 당시, 죽주방호 별감 송문주 장군이 15일간 항전해 적을 물리친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도 변이중, 황진 장군이 이곳에서 전투를 벌여 승리했고, 전쟁 후 다시 수축되면서 일부에 왜성(일본식 축성법)의 축성법이 반영됐다.
다만 곡륜(曲輪)을 특징으로 하는 왜성 특유의 평면 배치나 성문 구조 등은 나타나지 않는다.
죽주산성은 시대별 축성 기술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성곽 기술의 박물관’과 같은 곳이며, 현재는 산책로로 정비돼 1시간 이내로 둘러볼 수 있다.